‘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석주 이상룡과 임청각
우리나라는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이 패망하며 79년 전인 1945년 8월 15일 해방돼 국권을 회복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이를 기념하는 날이 광복절이다.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있지만, 그중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인물이 바로 석주 이상룡(1858∼1932)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석주 이상룡’ 석주 이상룡은 1858년 안동 임청각에서 태어났다. 유학자로서 구한말 항일의병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이후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이상룡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국권이 피탈 당하자, 1911년 1월 54세의 나이로 50여 명의 가솔과 함께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을 들고 만주로 망명했다. 망명 후 서간도 지역에 항일 독립운동단체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 되는 신흥강습소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정신을 일깨웠다. 그는 망명 전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며 독립운동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고, 사당에 모신 조상 신주를 땅에 묻으며 독립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1925년 임시정부가 국무령제로 바뀐 후 초대 국무령을 지냈으나 분열된 독립운동계에 회의를 느끼고 다시 간도로 돌아와 무장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였다. 석주 이상룡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독립전쟁에 열정을 바친 숭고한 삶을 살았으나,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2년 5월 지린성 서란에서 74세에 순국했다.‘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유해는 해방 이후에도 오랜 세월 타국에 묻혀 있다가 1990년에 와서야 겨우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됐다.▲ 독립운동의 산실 ‘임청각’석주 이상룡이 태어난 곳은 영남산 기슭 비탈진 경사면을 따라 지어진 전통한옥 ‘임청각’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1519년에 지은 가옥으로, 이상룡을 포함해 아들과 손자 등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임청각(臨淸閣)’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는다[登東皐以舒嘯 臨淸流而賦詩]’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이름이다.99간의 기와집이었다고 알려진 임청각은, 민가로서는 워낙 규모가 커 ‘도깨비가 세운 집’이라는 전설도 전해진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 중앙선 철도 부설로 인해 일부가 사라져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었다.안동시와 국가유산청(당시 문화재청)은 철도 부설로 훼손되기 이전의 임청각과 그 주변을 옛 모습에 가깝게 복원‧정비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허주 이종악의
2024-08-13